최종편집일시 : 2020년 07월 04일 05시 + 즐겨찾기추가
총 게시물 79건, 최근 0 건
   

희대의 영걸 柳子光(유자광)

글쓴이 : 편집실 날짜 : 2020-01-08 (수) 02:04 조회 : 218

↑소병호 선생이 쓴 고존문화연구회에서 출판한 "이야기 속의 고전"  


희대의 영걸 柳子光
(유자광)


"

지난해 류기성 작가의 "臣下" 라는 책을 읽어 본적이 있다. 내용은 유자광의 이야기로 유자광을 어떠한 측면에서 보아야 할것인가 라는 차원에서 간신이냐? 충신이냐?라는 측면에서 유자광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적인 차원으로 바라본 모습이었다.

이미 우리고장에서는 유자광의 고향답게 여러분이 유자광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유자광에 대한 인식을 기존과는 다르게 하고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임을 알수 있다.  또한 지역에서의 유자광에 대한 강좌는 물론, 유자광에 대한 재해석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유자광에 대한 전래된 이야기와 영향 등이 소개된다.  우리고장은 용성지에서도 유자광에 대한 기록과 출생은 물론, 관련한 이야기와 유적들이 전해지고 있다.

오늘은 소병호 선생이 고전 속의 이야기 속에 소개된 "희대의 영걸 유자광"이란 내용을 소개 해 본다.

"



해지기 전에 백일몽(白日夢)을 붙잡아라!

“영감, 대낮에 무슨 짓이예요!”

유규(柳規 )의 부인이 한사코 남편을 거부한다. 그러나 유규는 막무가내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는지 입을 꽉 다문채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

“ 대낮에 미쳤어욧! 에이그 망칙해라. ”

부인은 방을 뛰쳐나와 대문 밖으로 도망친다.유규는 부인을 쫒아가다가 자기집 숫말이 이웃집 암말과 엉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어? 이러면 안되는데 ’ 그는 서둘러 낫을 찾아들고 다가가 숫말의 음경(陰莖)을 싹뚝 잘라 버린다. 이때 여종이 나물을 캐 가지고 돌아와 부엌으로 들어간다. 유규는 다짜고짜 부엌으로 쫒아들어가 여종을 덮친다. 여전히 입을 꽉 다문채. 숨가뿐 활극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일. 젊잖는 사대부가 실성하지 않고서야 어찌 대명천지에 이런 망동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유규는 유자광의 생부가 될 사람이었다 당시 경주부사로 재직하던 유규는 어느날 고향에 다니러 와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백호 한 마리가 입속으로 쑤욱 들어오는 꿈이었다 용꿈을 꾸었다는 말도 있다. 깜짝 놀라 깬 유규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대몽이다! ’

그는 상서로운 기운이 몸에 서려 있음을 직감하고 벌떡 일어났다.

‘ 이 기운을 사람이 받으면 대인을 낳고 말이 받으면 천리마를 낳을 것이다 해지기 전에 받아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말을 해서도 안된다. 기운이 새 나가면 허사다’

그는 천재일우의 대운의 씨앗을 해지기 전에 여인의 몸속에 심어놓기 위해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대나무를 모조리 말리고 태어난 아이

열 달 뒤에 몸종은 떡 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렁찬 목소리와 관옥 같은 이목구비. 누가보아도 비범한 아이다. 아이 이름을 자광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광이 태어나자 마을의 대나무가 모두 누렇게 말라 죽어 버렸다. 사람들은 자광이 인근의 지기(地氣)를 빨아 마시며 나왔기 때문이라고 믿고 마을 이름을 누른대를 뜻하는 황죽리(黃竹里)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문무를 겸전한 천하의 기재(奇才)

자광은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만에 앉고 두달만에 일어서고 석달이 못되어 걷기 시작하더니 백일이 지나자 뛰어다니게 되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배워 다섯 살에 대학을 읽고 일곱 살이 되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하루는 아버지 유규가 큰 바위를 가리키며 글을 지어 보라고 하였다

자광은 즉석에서 글을 지어 올렸다.

根盤 九泉 (근반 구천)-뿌리는 구천에 서려있고
勢壓 三韓 (세압 삼한)-형세는 삼한을 눌렀도다.

자광은 열 살이 되자 키가 어른보다 크고 힘이 장사여서 어른도 당할 자가 없었고 서당에서도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누른대(黃竹里)는 날마다 수 백 명의 나무꾼이 통과하는 길목이었다. 그는 그들로 부터 통행세로 나무 한단씩을 거두어 들였다. 나무꾼들은 소년장사로 이름난 유자광의 기세와 위엄에 눌려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매일 300단의 땔나무가 어김없이 들어왔다. 그 나무를 쓸 만큼만 취하고 나머지는 온동네 집집마다 나누어 주니 다들 좋아했다.

또 날마다 요천에 나가 은어를 300마리씩 잡았다. 300마리씩 어떻게 잡느냐고? 어쩐 일인지 은어는 자광의 손만 닿으면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니 물장구를 치며 쫒아 다닐 필요 없이 그저 주어 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에 3천자의 문장을 외우고 물고기 300수를 잡고 나무 300단을 하는 것이 유자광의 일과였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예우

자광이 15. 6세 때 생모가 죽었다. 비첩은 죽어서도 예우를 못 받던 세상이었다. 자광은 용담사에서 과거준비중인 적실 친형 자환(子煥)을 찾아가 거짓말로 큰 마님 (자환의 생모)이 돌아가셨다‘ 고 꾀어냈다. 때 마침 홍수 때문에 보통사람은 건널 엄두도 못 낼 강물을 자광은 형을 업고 헤엄쳐 건넌다. 중간 쯤 왔을 때 자광은 자환에게 이실직고 하고 협박을 한다.

“형님, 내 생모가 비록 비첩이지만 형님에게도 작은 어머니 되십니다. 머리를 풀고 큰 상제 노릇을 해 주시겠소? 아니면 이 자리에서 물귀신이 되시려우? 㰡’자광아, 제발 목슴만 살려다오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하마” 자환은 벌벌 떨면서 등에 업힌채 머리를 풀어 보였다.

이야기 꾼의 말에 의하면 이때 자광은 청룡으로 변신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광은 적실 형 자환을 큰 상제로 내 세우고 양반가의 법식대로 상례를 치러 어머니에게 지어미로서의 위치를 찾아드렸다.

성종 20년에 유자광의 어미를 서울로 맞아들여 봉양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자광의 생모 사후에 아버지 유규가 또 소실을 취하였다면 그 소실을 계모로 모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별난 자기 소개서

어느 날 서울 남대문 한 복판에 별난 방이 하나 나 붙었다.

‘나는 하루에 3천리를 가고 책은 3천권을 읽었으며 짐을 3천근을 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천하기재 유자광 씀’

소문은 삽시간에 온 장안에 퍼졌고 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조는 당장에 입시시켜 시험해보고 그의 비범한 능력과 청산유수같은 언변에 탄복한 나머지 그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자광은 이시애의 난에 출전한 공으로 파격적으로 정 오품 병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세조13년(1468)에는 온양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신분의 장벽을 초월한 벼슬 길

이 때부터 무령군 유자광의 40년 벼슬길이 화려하게 전개된다. 무령군은 세조․ 예종 ․ 성종 ․ 연산군 ․ 중종 등 5대를 섬기는 동안, 예종 원년에는 남이의 모반사건의 조기 발고로 익대 공신1등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지고 황해도 관찰사, 병조판서, 오위도총관 등 요직을 거쳐 좌찬성에까지 이르렀으며 급기야는 중종반정에도 참여, 그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거사를 크게 도운 공으로 정국공신 1등, 무령부원군(府院君)의 작위까지 받는 등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무령군의 권세는 영의정을 능가했고 조정대신들을 턱으로 부릴 정도로 막강했다. 그는 결국 신진사류파의 탄핵을 받고 모든 관직을 삭탈당한 채 귀양가서 중종7년(1512)에 죽었다, 무령은 사후 400년이 지나서 순종2년 (1908) 양력 7월9일에 칙명에 의해 죄명을 탕척받고 관직을 회복 받게 되었다.

명철보신(明哲保身), 무령군

무령부원군은 연산군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詞華)때 유배당할 뻔 했으나 간신히 모면했으니 이는 그의 현명한 처신 때문이었다. 성종조에 폐비윤씨 사사사건은 전무후무한 충격사건이었다. 살아있는 왕세자의 생모를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국법이 지엄하다고 해도 인륜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은 국법에 의한 것이라기 부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인수대비 한씨의 사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폐비윤씨의 사사에 동조했지만 무령군 만은 성종에게 윤씨를 사사하는 것은 옳지않다고 적극 간언했다. 연산군도 이를 알고 무령군만은 벌하지 않았다.

이후 연산군의 무령군에 대한 신임이 시들해지자 무령군은 신변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중종반정에 적극 참여했는지도 모른다.


부관참시를 면케 한 선견지명

무령군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 같다. 그는 자기 모습을 닮은 下人 하나를 골라서 평소 후하게 대접하고 그가 죽자 공경대부의 예로 상례를 치러주었을 뿐만아니라 하인의 묘소 앞에 상석, 장군석, 신도비까지 갖추어 놓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을 때 자신의 묘는 평장하라고 유언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죽은 지 몇 달 후 부관참시의 형벌이 내렸다. 형리들은 하인의 묘를 파내고 무령군과 얼굴이 비슷한 그를 무령군으로 오인하고 목을 치고 사지를 절단하는 혹형을 가했다. 무령군의 묘는 지금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남이는 무령군의 무고로 죽은 것이 아니다.

남이는 태종의 딸 정선공주의 아들이었다. 남이의 모반사건으로 남이는 극형을 받고 정선공주는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무고만으로 왕의 외손을 죽이고 공주를 노비로 삼기까지 했겠는가?

예종원년 10월 28일 신숙주 등이 상주하기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전에 고기를 먹었고 남이는 대역을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용납 못할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 하소서” 하니, 왕이 명하여 저자에서 3일동안 효수하게 했다. 이것은 남이가 그 어머니(정선공주)와 간음한 강상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예종실록)

어떤 사람이 남이가 그 어머니(정선공주)와 관계 하였다고 밀고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내 반역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그를 사형시켰다.


400년만에 이루어진 무령군의 복권

무련군은 죽은지 400년만에 복권되었다. 순종2년(1908) 양력 7월 9일 나라에서 유자광의 죄를 씻어 주었고 같은해 11월 26일에는 관작을 회복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순종실록 7월 9일자에 의하면 내각총리와 법부대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융희원년 11월 18일 공경히 조칙을 받들어 유자광등 21명의 죄명을 탕척(蕩滌)하고 벼슬을 회복시켜주는 사안에 대하여 이미 내각회의를 거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융희(隆熙)2년(1908) 7월 12일자 일면 관보(官報)에도 게재되었다. < 출전 : 용성지. 조선조 실록. 구비설화 >

알려지지 않는 놀라운 사실들

무령군 유자광에 관해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놀라운 비화들을 여기 추가한다. 이것은 남원 포유 (대표 하진상)가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관련 기사들 중 근거가 제시된 것만 뽑아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사견이나 가감 없이 작성한 것이다.

◈ 유자광은 홍길동의 연고지인 정읍에서 성장했다?

무령군의 출생지는 남원이지만 정읍에서 주로 성장했다는 유력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정읍 산내면 너디 마을은 남양 홍씨의 세거지다. 이곳 홍씨는 원나라 때 세력가였던 홍복원. 홍다구 후손들이다. 공민왕의 외가도 이곳 홍 씨였고 우왕과 창왕이 죽자 그 위패를 옮긴 곳도 이곳이다.

단종의 충신 홍 령은 단종이 죽자 이곳에서 살았다. 무령군의 고모부인 홍 령은 사촌형인 홍길동과 우애가 깊었고 무령군도 홍길동과 교분이 있었던 것 같다.


◈ 의녀 대장금도 유자광이 추천?

영화 대장금은 국내에서도 인기 드라마였지만 세계 각국에 보급되어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고 있다. 영화 대장금의 주인공 대장금이 정읍 산내면 너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장금은 산내면 너디 장금산에서 중종의 후궁 홍씨를 따라온 의녀 장금을 말하는데 그녀를 궁중에 들어가도록 주선한 사람은 무령군이다.

무령군에게는 고모부가 또 한사람 더 있었다. 그는 남양 홍 씨의 외손인 권 채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권채는 향약집성방 이라는 의학서를 지었는데 무령군은 여기서 한민족 의학서적 만드는 것을 모방하여 후에 국악 책 악학궤범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 유자광의 담당부서는 궁중의 수랏상

무령군은 오랫동안 궁중의 수랏간 일을 보았다. 무령군은 음식에 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연산군 5년 (1499) 그는 함경도에 가서 맛있는 해물을 보고 역마로 사와 전복을 왕에게 진상하였고 최고의 전복요리법을 연구 했다. 무령군이 연산군에게 전복을 진상한 일은 후일 중종반정 후 중종이 그를 실각시킬 수 있는 좋은 빌미를 주게 된다.

고려조에 있어서 쌍화점노래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설경성이 의원으로 유명했고 무인시대에는 허중민이 의원으로 유명했다. 의녀로서 한국전통음식을 잘 요리하여 중종을 장수하게 함으로써 “대장금” 이란 애칭을 얻게 된 장금은 정읍 산내면 너디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확실하다.

◈ 궁중 천민을 위해 직언하다가 연산군의 진노를 사다.

유자광은 궁중수라간 종들을 위하여 연산군에게 건의하다가 형틀에 묶였다. 유자광은 여종의 아들이라서 미천한 종이나 악공 화원 등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폭군 연산군에게도 거침없이 하인들을 위하여 진언을 하였다.

연산군 10년(1504) (17년)1월 1일 (계해)1번째 기사

거대한 음식상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유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유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자기 당파의 권력투쟁을 위하여 아첨하는 시대에 미천한 궁중하녀 들이 거대한 음식상 들기가 힘겨워 큰상을 두 개로나누어 올리자는 개선을 건의 했다. 조선은 계급에 따라 그릇과 음식상까지 규모와 종류가 다르다.

왕의 품위로 규정된 수라상을 두 개로 나누자는 이야기는 분명히 연산군의 품위가 낮아지는 결과가 된다.

수라상을 올리는 천한 하인을 위하여 말한 죄로 형틀에 묶여서 죄인으로 고문과 문초를 받은 사람을 중종의 사림파 들이 최악의 인물로 만들고 그런 거짓 역사교육을 오늘도 모든 학교에서 가르친다.

◈ 명나라에 가서 연산군의 세자 책봉을 받아온 무령군

유자광이 수라간 궁중음식 개발과 대장금등 실무자의 고충을 위해 연구환경의 개선을 건의하여 왔다. 연산군이 정신병으로 마구 신하를 죽이는 위험한 말조심 시기 말기에 이러한 말을 하여 죽을 뻔했다.

연속극 여인 천하에서 보았듯이 한명회와 인수대비 한씨 천하에서 폐비 윤씨 (유자광의 고향 남원윤씨)를 잔혹하게 죽이고 세자 연산군을 죽이려는 시대에 성종이 유자광을 중국사신으로 보내어 세자 책봉을 받아왔다.

실록에는 없지만 인수대비와 한명회 한씨 세력이 유자광 죽이기 작전으로 폐비 윤씨를 죽이고 진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처럼 유자광의 거대한 세력에 힘입어 연산군은 왕이 되었다.

◈ 중종반정은 무령군이 주도.

그런데 연산군은 모친 독살의 진상을 알게 된 후 이성을 잃고 자기의 은인 유자광까지 죽이려 하자 유자광은 여기서 마음을 바꾸었고 중종반정은 성공했다.

무령군은 군사전문가였고 세조와 예종시대의 군사핵심세력이었다. 이성을 잃은 연산군으로부터 언제 죄를 받아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현실에 처하여 박원종의 반정동참요구에 드디어 응하게 되어 유자광이 총 지휘하여 반정에 성공 1등공신이 되었다.

그런데 이마저 2등공신 박원종을 주동자로 역사는 기록하여 일등공신 유자광을 말살한 기록이 중종실록기록의 말살이다. 유자광이 등용시킨 이장곤 유순정 성희안이 자기네들의 출세를 위해 유자광을 버렸다. 이로부터 삼포왜란의 평정자 박영문 신윤무 등 왜군을 척결한 유자광 세력을 처형하고 방심함으로써 임진난을 초래하였다.


◈ 무령군은 의학 • 음식 • 음악 • 축성의 전문가

성종과 연산군시대 유자광은 최고 세력자인데도 낮은 자리 사옹정과 정악원정 벼슬자리로서 수라간 음식 의학과 음악 가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수라간은 유자광의 오랜 담당부서로 자기 고향(정읍너디)사람이 주로 많이 들어 왔으므로 대장금도 이때에 이미 수라간으로 입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장금은 중종왕비의 병을 치료 하였는데 유자광이 숙청되고 8년 후에 대장금 이름이 조선 실록에 자주 나온다.

중종 10년(1515)10년) 3월21일(무인)1번째 기사에 의하면 헌부에서 선 • 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또 아뢰고, 전교하였다.

“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書吏)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래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醫女)인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兩端)을 참작하여 죄를정하는 뜻이다.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중종 17년(1522) 9월 5일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 • 콩 각 10석씩을 하사했다.

중종 19년 (1524) 3년) 12월 15일 (을사)2번째 기사 의술에 대한 권과 • 의녀의 요식 등에 대해 전교하다.

“기술을 조금 아는 자는 다 성종조(成宗朝)에서 가르쳐 기른 자인데, 이제는 그 권과 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醫司)에 물어서 아뢰라. 또 의녀 (醫女)의 요식(料食)에는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대장금은 한국영화에서 출발 동남아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가 알아주는 웰빙음식의 심볼로 그 인물의 태어난 곳에서 역사를 찾아야 한다.

의학과 음식 음악이 성종조부터 연구 발전한 것이라고 중종이 말하고 있다.

성종 연산군 시대 의학 음식 음악 국방군사에 가장 노력한 자는 사옹정(음식관리장관 ) 유자광 세력이었다.

◈ 중종이 유자광을 배척한 이유?

유자광은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중종이 유자광을 죽이는 죄목 중에 함경도에 출장 가서 전복을 역마에 싣고 와서 연산군에게 아부했다는 죄목이다.

얼마나 죄를 찾지 못하였으면 신하가 왕에게 전복을 드린 죄 그리고 첩의 아들 천출이라는 이유로 전국의 모든 선비들로 하여금 상소하게 하여 죽이었겠는가?

그 후 유자광의 세력으로 연산군시대에 홍경주가 군부 벼슬을 맡아서 중종반정에 성공하여 유자광 몫으로 홍경주 딸이 중종임금 희빈 홍씨로 입궐했는데 이것은 유자광이 서자라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자광 고모부 홍령의 친족 홍경주와 그 장형 홍경림 의 후손이 태인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고려시대 귀족 홍씨 마을이기에 입구에는 홍살문(紅門)이 있었고 장금산 서낭당집이 있고 또 음악악공이 사는 ‘ 재인동(才人洞)마을이 있는 누평현 돌평현의 소재지였으나 충선왕이 폐지한 현으로 보인다.

중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희빈 홍씨의 시녀 대장금은 왜 중종의 전문의원으로 실력을 발휘할 만큼 의술이 뛰어났던 것일까?

그 의술의 맥은 대장금의 고향의 이웃인 순창군 쌍치면에서 찾을 수 있다.

죽어가는 원나라 황제의 병을 치료한 설경성과 충렬왕 시대 영의정 설공검이 순창 쌍치면 쌍화점에서 살았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 송인의 집이 쌍화점의 이웃마을 (삼장사 불교신앙과 국사봉 당산 굿을 같이 신봉하는 마을)이었다. 따라서 이 근방은 허중민 등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궁중어의들이 대를 이어 나온 곳이다.

대장금이 중종의 노환을 치료하는 시기에 수차례나 장금산 마을의 태인 장금산 사람과 순창 쌍치사람 100세노인만을 고집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전라 관찰사에게 명령하였다.

한민족 문화를 이처럼 계승한 자를 추악한 역적으로 가르치고 조선실록기록에도 없는 말 ‘ 십만양병설을 이율곡의 제자 김장생이 자기 패를 높이기 위해 꾸미고 이순신의 승리를 송익필이 지시했다 라고 가르치는 한국학교 거짓말 이제는 역사진실을 찾아내야 할 때가 왔다

◈ 병법의 대가 유자광

무령군은 병법의 대가였다. 세조가 일개 갑사(甲士)였던 무령군을 정오품인 병조정랑으로 발탁한 것만 보아도 그가 병사에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수훈을 구성군 이준(李浚)과 남이(南怡)장군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유자광이라는 불세출의 인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무령군은 성종에게 북방변방의 성이 너무 낮아서 적을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성의 증축을 건의했고 남원성의 확장보수도 건의한 바 있다.

◈ 훈민정음 보급에 앞장선 유자광

무령군은 못 배우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을 가르쳐 그들의 눈을 띄우는데 솔선한듯하다. 이와 관련된 글을 발췌하여 소개해 본다.

세조대왕이 한글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세조대왕의 제갈공명 같은 책사 유자광 (승지 권채의 처조카)이 권채가 지은 향약집성방을 보고 음악책 악학쾌범을 만들려고 하자 이를 시기한 한명회를 비롯한 한문 고수파들이 유자광을 동래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유자광은 그곳에서 도공들에게 한글 ‘가갸거겨’ 문자를 가르쳐서 그 백자 조각이 유자광의 유배지 동래 기장현에서 최근 발견되었다.

성종대왕이 유자광을 석방하려고 하자 유자광을 죽이라고 상소문을 올린 성현과 함께 악학궤범에 한글노래 정읍사와 동동가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자광이 등용한 고향 친구 정극인이 한글노래 상춘곡을 지었다

연산군시대까지 한글을 사용했으나 중종반정 즉시 중종이 한글 언문청을 없애 버리고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유자광 계열 한글 창조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 숙청을 미리알고 낙향한 이항이 “태산이 높다하되” 시조를 일제집에 기록하고 이를 정읍사람 양사언이 시집에 실었다.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허균이 정의공주의 시댁 안맹담 마을인 정읍태인면 대장금마을 (옛 누평현. 굴돌현청지)에서 살았던 실제인물 홍길동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다.(임형택 교수 글)

한글 반대세력인 최만리를 가장 미워하고 축출한 사람은 수양대군이었다. 한편 권우는 충녕대군(세종)의 빈객이 되었고 권우 사후에는 권우의제자 변계량이 세종의 책사로 있으면서 권우의 아들 권채를 세종 측근 즉 대사성. 동부승지. 사가독서당에 근무케 하고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친교하며 근무하게 했다.

그리고 한글을 만든 주인공 세종의 딸 정의공주를 권채의 외가친척인 정읍 산내면 고향(대장금 탄생마을)사람 안맹담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중종은 권우 권채 세조를 이은 언문청을 폐지하고, 유자광파를 철저히 숙청했다.

촌평 (寸評)

무령군 유자광은 희대(稀代)의 영걸(英傑)이었다. 유시 이래 남원에 그 만큼 일세를 풍미한, 문무겸전의 준재가 일찍이 있었던가? 무령군. 그는 분명 도학군자는 못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난신적자는 아니었다.

그는 세조로부터 중종에 이르기까지 내리 5代를 섬기면서 40년을 한결같이 총신의 자리에 있었다. 난신이라면 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또한 위인이 얼마나 출중했으면 신분의 벽이 저 브란덴부르크의 장벽보다 두터웠던 차별사회에서 천출로 입신하여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마침내 중종반정에도 참여, 정국 1등공신 무령부원군 이라는 최고의 작위까지 누릴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순종2년(1908)에는 칙지에 의해 무령군의 죄명이 탕척되고 삭탈된 관작이 모두 회복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난신이 아니라는 명백한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한사코 그를 거부하려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편견에 사로잡혀 역사가 잘못 던진 주사위 놀음에 덩달아 놀아날 일이 아니다. 한 마디로 무령군 유자광은 우리 남원이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본 내용은 "이야기 속의 고전"(소병호 저)의 내용을 옮겨온 것입니다.

 


   

총 게시물 79건, 최근 0 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79
윤영근 (소설가)님 의 작품 "김삼의당" 이 한국소설 6월호에 실렸다.사)한국소설은 한국의 소설가협회가 운영하는 월간지이다.  소설 '김삼의당'은 조선시대 우리고장 서봉방에서 같은 해 한날 한시에 태…
편집실 06-24
78
↑소병호 선생이 쓴 고존문화연구회에서 출판한 "이야기 속의 고전"  희대의 영걸 柳子光(유자광)"지난해 류기성 작가의 "臣下" 라는 책을 읽어 본적이 있다. 내용은 유자광의 이야기로 유자광을 어떠한 …
편집실 01-08
77
1. 아름다운 계절 봄날에 만난 인연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독일문학의 거장인 시인 ‘헤르만 헤세’는《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싯다르타》등과《유리알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
편집실 12-11
76
산벗 박정임 수필집『동화나라 이야기』작품해설        꾸밈없는 소박한 삶의 이야기       휴머니즘 사랑의 랩소디(Rhapsody)- 김 우 …
편집실 12-11
75
책소개 소설 《신하(臣下)》는 왕의 올바른 통치를 위한 신하의 역할을 조선 시대의 ‘류자광’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천한 서출 신분으로 정1품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고, 세조, 예종, 성종…
편집실 11-18
74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 발간남원시와 한국예총 남원지회에서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을 발간하였다. 이번에 새로 발간된 「남원항일운동사」 증보판은 ‘3.1운동 1백주년’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
편집실 08-24
73
[신간] 용성스님 일대기“아름다운 삶”-저자 : 윤영근 사람마다 제각기 벽처럼 서 있는 지라 이 속에 이르러서 무엇을 찾으려 합니까? 선비는 시서(시서)를 읽으며 예으를 배우고 농부는 …
시스템관리자 01-29
72
소리꾼의 삶을 찾아서.....  한 소리꾼의 삶을 세상에 내 놓는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한갑자만이고, 이름 앞에 소설가라는 명패를 단지 40년만이다. 집안의 가업인 한의원에 종사하는 낮 시간을 빼면 온통 …
편집실 01-08
71
여성농악 예인 구술집 󰡔향기조차 짙었어라󰡕 향기조차 짙어라 기억 속에 묻혀있던 여성농악이 한권의 책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여성농악 예인 구술집 '향기조차 짙었어라'가 민속…
시스템관리자 12-06
70
"국역 삼의당김부인유고집" 출판기념식조수익 번역 / 성백효 감수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남원부 서봉방(棲鳳坊)에 사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집에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신랑은 같은 동네 사는 진주하씨(晉州…
시스템관리자 11-17
 1  2  3  4  5  6  7  8  맨끝
 
Copyright ⓒ www. All rights reserved.     contact:
상호(법인)명: 유한회사 남원포유 / 제보전화: 063)625-5857 / FAX: 063) 635-4216
주소: 우)55750 전라북도 남원시 옥샘길 31 (동충동)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하진상
등록번호: [전라북도, 아00490] / 종별: 인터넷신문 / 등록년월일 2015년 8월 10일
발행인·편집인: 하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