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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도 남원지역 동학혁명운동(2)
글쓴이 : 가람 날짜 : 2013-12-30 (월) 19:18 조회 : 1006



6. 운봉 민보군의 남원 점령


  대군이 북상하자 예상대로 운봉의 민보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남원에 살던 운봉의 전 군수였던 양한규(梁漢奎)는 10월 20일에 사인(士人) 장안택(張安澤)과 정태주(鄭泰柱)와 공모하여 운봉 박봉양을 부추겨 남원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24일에 민보군 2천명을 동원하니 남원성은 거의 비어 있어 싸우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다.『박봉양경력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0월 20일에 남원에 사는 전 군수 양한규, 사인 장안택, 정태주가 와서 이르기를 남원 부성에는 적괴 개남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지금 그들은 전주로 떠나갔다. 이 때에 운봉읍 의사를 분대(分隊)하여 남원성에 와서 수비하도록 하여 새 부사의 도임을 맞는 것이 좋겠다. 이웃과 접해 있으니 서로 도와주는 의리로 허락하고 약조하니 24일로 시기를 정하였다. 창포군( 砲軍) 2천명을 뽑아 이끌고 남원부의 성중에 당도하니 과연 김개남의 병력은 이미 철수하여 돌아갔고 성에 남아 있던 적도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나 소문을 듣고 도망쳐 흩어졌다".

  그런데 무혈 입성했던 운봉 민보군은 3일 만인 10월 27일에 스스로 물러갔다. "유진(留鎭) 3일간에 동학군 약간 명을 체포하여 다스렸으며 동학군의 양곡은 토민(土民)과 관리들에게 맡기고 … 돌아왔다"고 하였다. 동학군 대병력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박봉양은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박봉양경력서』는 "유복만, 김경률, 남응삼, 김홍기, 김우칙, 이춘종(李春宗), 김원석(金元錫) 등이 동학군 수천 명을 이끌고 성중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담양의 남응삼은 전량관(典糧官)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9월 30일에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0월 1일에 담양에 이르러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조달하기에 바빴다. 10월 14일에 김개남 대군이 남원을 떠나자 담양에 있던 남응삼은 10월 24일에 남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석모(鄭碩謨)의『갑오약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그믐날 오후에 남응삼을 따라 담양으로 떠났다. … 순창 적성강(赤城江)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적성촌에서 자고 … 이튿날 일찍 적성을 떠나 담양에 이르렀다. 온 고을의 동학도 수 천명과 이졸들이 모두 나와 맞으니 그 위용이 대단하였다. … 남씨는 비록 식견이 없으나 본심이 독하지 않아 … 민정은 조(趙) 담양 부사에게 일임하고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 10월에 김개남이 기병하여 서울로 올라갈 때 무리를 이끌고 오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남응삼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 남응삼은 남원으로 가서 성을 지켜 대접주가 개선하여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려 하였다. … 24일에 남응삼은 남원으로 떠났다.

담양의 남응삼은 운봉 박봉양군이 남원성을 점령했다는 급보를 받자 10월 24일에 수백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남원으로 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원으로 직행하지 않고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태인 오공리(五公里) 김삼묵(金三默)에게 들려 수천 명의 병력을 합류시켰다. 다음날인 25일에는 임실로 내려와 다시 증원한 다음 남원 동학군과 합세하여 27일에 남원성을 빼앗은 것이다. 동학군과 운봉 민보군이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인 것은 11월 14일이었다. 이 날은 전봉준 동학군과 김개남 동학군이 공주에서 대패한 후였다.『박봉양경력서』에는 11월 13일(양 12월 9일)에 관음치(觀音峙)를 지키던 방수장(防守將)인 전주부(前主簿) 정두회(鄭斗會)가 와서 이르기를 "고개 아래 남원의 산동방(山東面) 부동(釜洞) 마을 앞에 남원에서 나온 적들이 많이 모여 운봉을 침범하려 한다"고 전하였다.『영상일기』11월 조에는 "15일 날씨는 맑았는데 적도들은 운봉을 넘어가고자 관음치 아래에 수만의 무리를 주둔시켰다"고 하였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시킨 후였다. 당시 함양, 안의, 산청군 보수세력들은 동학군이 경상도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운봉 수성군을 적극 지원하였다. 운봉 수성군은 14일 축시(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박봉양경력서』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산밑으로 내려가 선제 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다 도망치는 척 후퇴하여 산상으로 올라가며 적을 유인하였다. (동학군은 계략에 말려들어) 운봉 경계까지 따라 올라가자 (운봉 수성군은) 급히 돌아서서 포환을 쏘아댔다. 한편 뒤에 포진해 있던 지원 병력은 남북의 정상에서 일제히 활을 쏘고 돌을 굴려댔다. 뒤따라 좌우에 쌓아 (두었던) 나무더미를 (굴리고) 대포도 발사하자 많은 무리들이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 (전투는) 14일 인시(寅時)로부터 15일 진시(辰時)까지 벌어졌다. … 함께 싸우는 사졸들과 하늘에 서약하고 죽기로 전진하여 거괴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등 5한을 베어버리자 적의 기세는 드디어 꺾이었다. 『오하기문』에는 "봉양이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적이 산상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천보총(千步砲)을 일제히 발사케 하여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북을 두드려 쫓아내자 (동학군이 공격하기 위해 몰고 올라 왔던) 소들이 놀라 뒤돌아 달리며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난폭하게 날뛰며 뿔로 찌르고 발길질을 하니 밟히고 찔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멀리서 동아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하늘과 큰 돌산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적들이 깔리고 쓰러져 머리도 터지고 허리도 끊어져 죽으니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하였다. 가마골(釜洞)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길은 세 곳이며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다. 맨몸으로 오르기 어려운데 소 떼를 앞세워 공격했다는 것은 설화에 가깝다. 『박봉양경력서』대로 이 전투는 14일 새벽(寅時, 오전 3시∼5시 사이)부터 15일 오전(辰時, 오전 7시∼9시 사이)까지 꼬박 2일간을 계속하였다. 동학군이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으나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이 방아재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남원 동학군의 최후는 11월 28일에 찾아왔다. 11월 24일에 송내(松內)의 김원집(金元執)과 양상렬(梁相烈)이 운봉으로 달려가 적의 병력은 3천에 지나지 않으니 공격하자고 부추겼다. "지금 성중에는 이사명, 유복만, 김경률, 김홍기, 김우칙, 이춘종, 이춘흥, 권일선, 김원석, 최진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자칭 대장이라는 승려가 지키고 있다. 그중 유복만은 … 3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곡성에 가 있으며, 그 밖의 천여 명은 약탈하려고 흩어져 성안에는 3천명이 못된다"고 하였다. 박봉양은 이튿날(10월 25일) 아침 운봉 군수와 같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불선치(佛仙峙)를 넘어 이백면 남평촌(藍坪村)에서 유진하였을 때 진주(晋州) 전 만호(萬戶) 윤순백(尹順伯)이 2백 명의 원병을 끌고 왔다. 그런데 오후에 유치(柳峙)를 지키던 오재언(吳在彦)이 달려와 황내문이 장수 동학군을 이끌고 상동면 번암리(磻岩里)에 모여 운봉을 침범하려 한다고 하였다. 운봉 군수는 즉시 돌아가 수성하였고, 박봉양은 황내문이 있는 번암으로 갔다. 날이 저물자 번암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초입인 원촌(院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장수 접주 황내문은 운봉 수성군이 남원으로 떠나자 고을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고자 수백 명을 이끌고 번암(磻岩)까지 진격하였다. 뜻밖에도 박봉양이 저녁 때 되돌아오자 동학군은 26일 새벽에 원촌을 기습하여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반격을 받게 된 동학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장수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박봉양은 일단 운봉으로 돌아가서 병력을 재정비한 다음 10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주천면 솔치를 넘어 남원 동문밖 5리 지점인 용담 앞들에 당도하여 요천(蓼川) 산림 속에 숨어들었다. 산상에서 동학군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포군 백여 명을 쑥고개( 峙, 남쪽 3㎞ 지점)에 보내 동학군의 소집단을 공격하고 나서 남원성을 포위해 들어갔다. 동학군은 화산당(花山堂) 접주 이문경(李文卿)과 오수 접주 김홍기와 임실 접주 최승우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다. 성 위에서 완강하게 방어하자 운봉 수성군들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오하기문』에는 민보군의 병력은 4천여 명이요, 동학군은 8백여 명이라 하였는데 이 수가 정확하다고 본다. 그리고 동학군은 "성 위에서 방포하며 돌을 던져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고 하였다. 운봉 수성군은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경에 성문 아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남·서 두 문에 나무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오하기문』에는 "대나무로 문짝 같이 짜서 나무 단에 묶어 짊어지게 하여 구부린 채 뒷걸음질로 성문에 날라다 쌓아 불을 질렀다"고 하였다. 동학군은 서문과 남문이 불 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동학군 사살자는 30여 명이고 생포자는 백여 명이라고 하였다. 포살된 사람 중에는 표자경(表子景), 최진철(崔鎭哲), 고량신(高良信) 등 8명의 접주가 끼어 있었다. 민보군도 사살자 5명, 부상자 84명이라 하였다. 성안으로 들어간 박봉양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남원에 이르니 동비는 이미 보성, 옥과현으로 도주한 뒤였다. … 모두 불에 타 들어가 잘 집이 한 채도 없었다. … 운봉 민병들이 가옥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 (박봉양은) 민병을 이끌고 남원에 들어와서 된장, 남비, 솥, 기타 일체의 주민 재산을 빼앗아 갔다. … 이 곳에는 관미(官米)와 동학군의 군량미가 많았는데 박봉양이 민병을 시켜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하였다. 박봉양은 12월 3일에 일본군과 경병이 전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 산동방(山洞坊) 상동원으로 갔다.『박봉양경력서』에는 "일병이 전주에 도착하자 소인배들의 헐뜯는 말을 들고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 곧 부남(府南) 40리에 있는 산동원(山洞院)으로 이동하였다" 한다. 그러나 박봉양은 자신이 저지른 죄상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이다. 박봉양이 산동(山洞)에 이르자 또다시 민가를 약탈하였다. 이 지역의 동학 접주 김형진(金亨鎭)은 저항해 보았으나 힘이 부쳐 흩어지게 되었다. 김형진은 간신히 피신하여 1895년 5월부터 참빗장수로 가장하여 황해도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찾아갔다. 때마침 해주 팔봉 접주 김구(金昌洙·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중국 병력을 끌어들여 왜병을 물리치자는 데 뜻을 같이 한 두 사람은 1895년 6월에 압록강을 넘어 심양(瀋陽)까지 가서 마대인(馬大人)을 만났다. 구두 승낙을 받은 두 접주는 일단 해주로 돌아왔다가 9월에 다시 들어갔다. 김구는 안주에서 발길을 돌려 민중전의 살해자에 대한 보복을 결심하였다. 혼자 마대인을 면담한 김형진은 약속을 받아내고 해주로 돌아와 항일투쟁을 벌이게 되었다.『동학란기록』<중범공초(重犯拱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백낙희(白樂喜) 초사(招辭)에 "작년(1895年) 12월 12일에 해주 검단방(檢丹坊) 손이고개 김창수(金昌洙·金九) 집을 위토(委討)하야 창수(金九)와 한가지로 묵방(墨坊)의 청룡사에 유(有)하난 김형진을 방견(訪見)하온즉 형진의 말삼이 작년(1895年) 6월, 9월 양차를 청나라에 가서 심양에 둔주(屯住)하는 마대인과 심양 자리(刺吏) 연왕(燕王) 이대인께 진동(鎭東) 창의(倡義) 인신(印信)과 직첩을 수출(受出)한 후 곧 황성에 들어와 상소하고 환래하였난대 마대인이 불구에 솔병하고 출래할 터이니 우리측에서 평안·전라·황해 삼도 도통영(都統營)이 되고 여측은 장연(長淵) 선봉장이 되어 각기 군병을 취(聚)하난대 네가 장연 산포(山包)를 기동하야 먼저 군기를 탈취한 후에 관장과 관속을 도륙하고 솔병하여 내게 오면 검단방 유학선(柳學先)과 안악 대덕방(大德坊) 최창조(崔昌祚)와 문화군 서장동(遮墻洞) 명부지(名不知) 이가(李哥)로 합력하야 해주부를 소탕하면 어언간 청병이 나오게 될 터이니 그 때에 합세하여 경성으로 직향하야 … . 이런 움직임이 관에 발각되자 많은 해주 지역 동학도가 체포되었다. 그 후 김형진은 피신하여 전라도 금구 원평으로 숨어들어 역시 동학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897년에 신사로부터 대접주의 임첩(任帖)까지 받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898년 1월에 전주 주재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 나와 장독(丈毒)으로 순국순도 하였다. 일본군은 박봉양의 잔학한 약탈행위를 확인하자 운봉 현감에게 그의 소재를 물으니 "동학군을 치러 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나주로 가서 그의 소재를 확인한 일본군은 12월 5일에 "군무를 상의하려 하니 나주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봉양이 11일에 나주에 당도하자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1895년 3월에 열린 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7. 좌도 동학군의 최후


  청주에서 패전하여 태인 산외면 너듸(四升) 로 내려와 매부 서영기(徐英基) 집에 숨어 있었던 김개남은 임병찬(林炳讚, 1914년에 의병활동, 거문도로 유배, 1916년에 별세)의 꼬임으로 종송리(種松里) 산상 마을에 있는 송두용(宋斗鏞)의 집에 있다가 임병찬의 고변으로 심영(沁營) 대관 황헌주(黃憲周)에게 12월 1일 체포되고 말았다. 최현식(崔玄植)은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이웃 종송리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의 집으로 유인했다. 종송리는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니 더욱 안전한 곳이므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해 놓고 김송현(金松鉉), 임병욱(林炳昱), 송도용(宋道鏞)을 시켜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게 고발하였고 이도재는 황헌주에게 강화병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로 가서 (체포하도록 하니) 12월 1일 새벽에 김개남을 잡게 되었다"고 하였다. 김개남의 손자인 김환옥의 증언에서도 "임낙안(임병찬)의 꼬임에 빠져 종송리에 가 있다가 12월 1일 새벽에 뒷간에서 나오다 개남장 할아버지는 강화병에 잡혔다"고 한다. 전주로 압송된 김개남은 이도재(李道宰) 감사에 의해 풍남문 밖 서교장(西敎場)인 초록바위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41세의 짧은 나이로 생애를 마친 그의 수급은 서울로 보내져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 되었다가 지방으로 돌렸다 한다. 일본군은 김개남의 행적을 조사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여 정부에 대해 처형한데 대해 항의하였다. 『일성록』12월 조에는 "적괴 김개남을 생포하였으면 응당 경사(京師)로 보내 조사해서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데,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경솔히 효수 하였다. 비록 중도에서 창탈 당할 염려가 있다하여 제멋대로 처단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라감사 이도재의 봉급을 이등으로 강등할 것을 청하였다" 한다. 임병찬은 논공행상으로 1895년에 임실 군수로 임명하였으나 고사하자 황헌주을 임명하였다. 남원성을 빼앗긴 동학군들은 구심점이었던 김개남마저 체포되어 전주에서 처형되자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 임실 동학군은 손병희 동학군을 따라 북상하여 항쟁하였으며,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순천 또는 장흥지역에서 항쟁하였다. 그리고 담양 동학군과 흥양 동학군은 그 지역에서 항쟁하였다. 처참한 종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실(任實) 동학군

  11월 25일 원평에서 일본군과 경군의 공격을 받고 전봉준 동학군과 같이 싸우던 손병희 동학군은 태인으로 후퇴, 전봉준과 헤어진 다음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28일에 임실 갈담으로 왔다. 청운면 새목터 허선(許善)의 집에 있던 신사를 모시고 장수, 무주를 거쳐 북상하였다. 이 때 임실 동학군 일부는 손병희 동학군을 따라 12월 11일에 용산장터(龍山場垈)까지 북상하였다. 그 중 일부는 보은 북실까지 따라갔다가 일본군과 민보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돌아왔다 한다. 임실에 남아 있던 지도자들은 순창 회문산(回文山) 등으로 은신하여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현감 민충식이 동학에 가담하였고, 전주 이씨 문중이 입도하게 되어 보수세력과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이 들어온 후에도 동학도를 색출하는 불상사는 거의 없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임실은 모두가 동학도이고 오수역(당시 남원군에 속함)도 또한 인민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오수역에 들어가 동학당 5명을 붙잡았다.(이 중 접주 1명은 도주하였다) … 인민들이 취할 바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우선 인심을 바로잡기 위해 접주 5명을 처단하자 이들은 동학에 가담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깨닫게 된 것 같다"고 하였다.

(2) 담양 동학군

  담양에서 보수세력이 태동한 것은 11월 30일경부터이다. 동학군과 부사 및 보수세력은 그 동안 서로 도와가며 타지 동학군들이 들어와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는데 협력하였다. 특히 남응삼 대접주는 민폐를 피하기 위하여 대도소에서 할당한 양곡과 부과금을 관이 갖고 있던 금전으로 충당하여 민폐가 없었다. 그런데 11월 28일에 남원성이 점령되고 대접주인 남응삼도 자취를 감추자 사정은 달라졌다. 일본군과 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보수세력들은 점점 날뛰기 시작하였다. 구상순(具相淳, 義兵將)과 박동진(朴東眞), 국치열(鞠致烈), 국의열(鞠義烈) 등은 드디어 장정들을 모아 5백 여명의 수성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각 면으로 출동하여 수색에 나서 거물급인 김중화(金重華) 접주를 위시하여 이장태(李長泰) 접주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국문보(鞠文甫)와 김희완(金喜完)도 체포하였다. 선봉장 이규태(李圭泰)의『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이나『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금월 초 3일에 대진(大陣)이 본부에 들어온 다음 순창 소모(召募) 중군 신기환(申基煥)과 군관 임민학(林敏鶴)이 150명의 병졸을 이끌고 왔으며, 옥과(玉果)에서도 부의군(赴義軍) 100명을 이끌고 왔다" 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먼저 온(순창, 옥과 민보군이 들어오기 전) 별군관 황범수(黃凡秀), 이지효(李志孝), 이선(李璇)과 같이 본부 의병장 구상순, 수성군 통령 박동진, 국치열, 작대(作隊) 별장 국의열(鞠義烈) 등이 힘을 모아 본부 수성군 중 300명을 출동시켜 별정 부교(府校)의 지휘로 비류(匪類)의 체포에 나서 거괴 이장태를 포착하였다"고 하였다. 『동학란기록』에는 "담양의 적괴 22명을 12월 4일에 잡았다"고 하였다. "그 중 이문수(李文水), 채대로미(蔡大老未), 장대진(張大辰), 임송도(林松都)는 포살하고 국문보(鞠文甫), 김희완(金喜完)은 경군소(京軍所)로 압송하고 접주 이장태는 일본군에 넘겨저 포살(砲殺)되었고 나머지 15명은 담양옥에 가두었다가 경중을 가려 처벌했다"고 하였다. 이 때 노획한 조총 10정도 담양과 순창 수성군이 5정씩 나누어 가졌다 한다. 이들은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군으로 몰아 재물을 약탈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예사롭게 하였다. 선봉장인 이규태가 오죽하였으면 "불지르고 토색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금령을 내렸겠는가. 읍내에 동학군이 군량미로 비축해 두었던 조(租) 26석과 용귀동 대곡(大谷)에 비축해 두었던 군량미 80석도 몰수하여 담양과 순창 수성군이 나누어 먹었다. 김중화(金重華)는 용귀동 출신으로 김개남과 같이 청주까지 진격했다가 담양으로 돌아온 후 체포되어 담양옥에 수감되었다가 용하게 탈옥하였다.『동학사초고』에는 "관병에게 사로잡혀 담양옥에 갇히어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가 옥문을 부수고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남응삼과 김중화는 충청도 한산(韓山)과 전라도 임피(臨陂)에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1903년부터 이들은 동학 재건에 앞장섰었다. 일본군이 담양에 들어온 날짜는 12월 7일 오후였으며 하루 주둔했다 8일에 광주로 갔다. 일본군과 경군이 떠난 다음 구상순 의병장은 용귀산 산상에 동학군이 진을 치고 인근에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고 토벌에 나섰다. 용귀동 접주인 김형순(金亨順)과 김문화(金文化)를 위시한 수십 명의 동학군은 산상에 소규모의 석성(石城)을 쌓고 이 곳에 근거지를 만들고 인근 지역 보수세력을 괴롭혔다. 산이 높고 깊어서 골짜기가 많으며 나무도 울창하여 관군이 공격하기가 힘든 곳이다. "연일 둘러싸고 얽어 잡으려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며칠간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순과 김문화는 12월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이 곳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수성군은 이들을 놓쳐버리자 무고한 농민만 잡아다 동학군으로 몰아 악형을 가했다.『순무선봉진등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용귀동의 괴수인 김형순(金亨順)과 김문화(金文化) 등이 도당을 이끌고 창평(昌平) 용귀산에 웅거하여 있다 하여 담양부 수성군이 출동하여 연일 둘러싸고 얽어 잡으려 하였다. 이 산은 본래 큰산이라 골짜기가 깊고 많으며, 나무도 빽빽하여 번쩍하는 사이에 달아나 숨으니 한동안 체포하지 못하였다. 이들 무리 중 혹시 백양으로 달아나면 포착하려고 추격하였으나 몇 명을 잡아 지금 취조 중이다.

  담양 향토사학자 이해섭(李海燮)은 동학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용귀산 정상에는 작은 석성(石城)이 아직 남아 있다 하며 조정기(曺正淇), 국채우(鞠埰宇), 국정현(鞠定鉉) 세분이 들려준 당시의 이야기를 단양의병운동사에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932년 무정면(武貞面), 담양면(譚陽面) 면장을 역임했던 고 조정기(曺正淇)씨, 그리고 국채우(鞠埰宇), 국정현(鞠定鉉)씨 세분께서 들려주기를 … 어느 날 용흥암에 숨었던 동학농민군 1백여 명은 쪼재골을 넘어 용귀산에 포진하고 있다가 병력 증강과 식량 공급을 위해 한밤중에 용구동 마을로 내려와 허기를 채우고 … 아침 10시까지 잠에 빠졌다. … 관군과 일본군이 주평리(용귀동) 일대를 포위하고 기습하여 왔다. 동학군은 두 사람의 희생자를 내고 용귀산으로 돌아갔다. … 수많은 농민들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심한 폭행과 고문을 받았다. … 이 날 전투에서 동학군 10여 명이 사살되었다.

  여기서 용귀동 공격에 일본군이 출동했다 한 것은 와전된 것 같다. 1895년 5월 13일(양)자로 후비보병 독립제19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정상(井上馨) 특명전권공사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담양 전투에 일본군이 참여한 흔적이 없다. 담양군에 일본군이 들어온 것은 12월 7일이었다. 이 곳에 들린 일본군은 하루를 묵고 광주로 떠나갔다. 용귀동으로 출동한 병력은 12월 3일에 담양으로 온 통위영 대관 신창희(申昌熙)와 오창성(吳昌成)이 이끄는 관군이었다. 이들은 동학군 토벌에 나섰으나 용귀산 공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용귀산 공격은 일본군과 관군이 떠난 후에 수성군이 단독으로 공격하였다고 추측된다. 이들이 살해한 동학군의 수는 전후 약 40명 정도라고 여겨진다. 김형순은 1895년 1월 21일에 불행하게도 전라도 정읍에서 밀고되어 수의(繡衣, 암행어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담양으로 이송되어 8월에 국홍묵(鞠弘默)의 아들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동학관련판결문집(東學關聯判決文集)』에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우 피고 국재봉(鞠在奉)과 국재준(鞠在俊)은 그의 부친 국홍묵(鞠弘默)이 갑오년 8월 3일에 용귀동 비괴 김형순, 김문화 등에게 피살되었는데 이들이 도피하여 복수하지 못하였다. 본연(1895) 1월 21일에 전라도 수의(繡衣)가 정읍에서 비괴 김형순을 체포하여 담양군으로 압송하였다. … 김형순에게 피고의 부친을 살해한 이유를 물은즉 … 국홍묵이 동학의 집강을 도득(圖得)하여 읍포(邑包)를 설하고 용귀동접을 도륙한다 하기로 통문을 발송하여 1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8월 3일에 사정(射亭)에서 포살하였다 한다. … 1월 24일에 광주부에서 담양으로 김형순을 보내오자 … 피고 국재봉과 국재준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하여 허락하였다. 불월루(拂月樓) 아래서 만나게 하자 김형순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관원에 끌려 홍전문(紅箭門) 앞에 이르자 피고들은 달려들어 김형순을 칼로 찔렀다. 국재봉은 김형순의 배를, 국재준은 목을 찔러 죽게 하였다. … 1898년(광무 2년) 12월에 재판부는 국재봉에게 태 1백대와 종신형을, 국재준에게 태 1백대와 징역 15년을 선고하였다.

(3) 순창, 곡성, 구례, 옥과, 창평지역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장교는, 순창군 민병은 동학군들이라고 믿고 군수에게 물었다. 군수는 "따져보면 동학도였던 자도 있으나 나의 명령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순창군의 민보군은 동학군이었던 사람들이 민보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순창군에서는 동학군 토벌이 별로 없었다. 곡성, 구례, 옥과, 창평지역에서도 동학군과 보수세력 사이에는 마찰이 없었다. 다른 지역 동학군이 들어와 약탈하지 못하도록 서로 협력하여 막으면서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 12월에 관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민보군이 조직되었으나 동학군의 희생자는 극히 적었다. 곡성 현감의 보고에 의하면 도망친 동학도는 몇 명이 있었으나 장위영군이 지나가자 동학군의 소요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병과 일병이 지나갈 때 괴수 몇 명을 잡아다 장살하는 데 그쳤다고 하였다. 곡성군에서는 5월경부터 김명국(金明局)을 비롯한 일부 보수세력들이 동학군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학진 감사의 결단으로 6월 중순부터 집강소가 설치되면서 보수세력들은 수그러들었다. 한편 김개남이 직접 찾아가 설득한 보람도 없지 않았다. 이들 보수세력들은 동학군으로부터 민보(民堡)로 지목되어 숨어살았다. <곡성군수장보(谷城郡守報狀)>에 의하면 동학군이 무너지기 시작한 11월 말부터 이들 보수세력들은 일어나기 시작하여 동학군을 위협하였다. 12월 1일경에 김명국(金明局)은 민보군을 조직하였고 동학군을 체포하러 나섰다. 12월 5일에 경군과 일본군이 들어오자 그간에 체포한 동학군 몇 사람을 일본군에 넘겨 살해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2월 20일이 지나서 소모소(召募所)에서 김명국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아마도 공형(公兄)들이 소모소에 김명국의 비리를 고하여 이런 조치가 내려진 것 같다. 향중 인사들은 공형들을 개체(改遞)하고 김명국을 수성군 중군으로 삼아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즉 신정렬(申正烈)을 호장으로, 정일훈(丁日熏)을 이방으로, 김명국을 중군으로 삼아 동민들을 작통(作統)하여 밑바닥까지 동학도들을 초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순영문의 명에 따라(甘飭) 김명국은 순창군에 이수(移囚) 되고 말았다. 혁명기간 중 곡성군 동학군들은 모난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원이 심하지 않았다. 남원에 있는 전라좌도 대도소에서 출동하여 군량미를 거두어들이거나 부민 또는 구실아치들의 재산을 탈취한 일은 있으나 지방 동학군이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대세가 기울어지자 주요 접주들은 일찍 자취를 감추어 남아 있는 동학군은 대부분 협종자들이었다. 그래서 12월 하순부터 곡성지역은 평온을 되찾았다. 공형들과 김명국 사이에 알력이 생겨 시끄러웠을 뿐이다. 구례현 역시 동학군과 보수세력 간에 분쟁이 없었던 곳이므로 대량 학살은 없었다. 구례현에는 전 현감과 재직현감이 동학군에 가담하여 동학을 지원했기 때문에 혁명기간 중 보수세력들은 움츠리고 있었다.『오하기문』에는 전 구례 현감 남궁표(南宮杓)와 당시 현감 조규하(趙圭夏)는 동학에 입도, 포덕하는데 앞장섰다 하였다. 현감은 임정연(林定然)으로부터 입도하여 현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하였으므로 동학군은 급속히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기포한 접은 임봉춘(林奉春)을 비롯한 7명이었을 뿐이다. 동학 세력이 무너진 후 12월 9일에는 장위영 부영관인 이두황(李斗璜)이 경군 800명을 이끌고 들어와 2일간 체류하였다. 이 때 살펴본 결과 구례현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선봉진정보첩(先鋒陣呈報牒)』에 의하면 이두황은 "일본군 남소사랑(南小四郞)과 같이 … 12월 5일에 순창에 이르러 2일간 체류하다가 … 7일에 순창을 떠나 곡성을 거쳐 9일에 구례현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입성하여 보니 본현 유학생 이기(李沂)가 수 백 명의 민병을 조직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읍내는 빈집이 없었으며 모두가 안업(安業)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구례현의 상황은 접주 임정연(林定然)과 접사 양주신(梁柱臣)을 체포하여 포살한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다. 담양의 이웃인 창평현(昌平縣)에서는 상당한 희생자가 나왔다. 12월 6일부터 동학군 토벌에 나선 민보군은 접주 한충상(韓忠相)과 이름 있는 동학군 11명을 체포하였다. 즉 백처사(白處士), 조공서(曺公瑞), 장영옥(張永玉), 하재원(河在元), 김봉철(金奉哲), 백준수(白俊水), 한성옥(韓成玉), 원만석(元萬石), 이용석(李用石), 강판석(姜判石), 정영운(鄭永云) 등인데 어떻게 처분했는지 알 수 없다. 일찍부터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던 백학(白鶴)과 유형로(柳亨魯) 접주는 다행히 피신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옥과현에서는 수명의 동학군이 일본군에 넘겨져 타살 당하였다. 남원에서 패한 동학군 상당수가 구례와 옥과 지역으로 넘어왔다 하여 일본군 150명은 상원(桑原榮次郞) 대위의 인솔로 옥과현(玉果縣)에 들어왔다.『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중요 동학 접주들은 이미 피신하고 전재석(全在錫), 김낙유(金洛有), 황찬묵(黃贊默) 등은 12월 초에 체포되었으며 7일 일본군이 들어오자 넘겨져 처참하게 타살되었다.

(4) 낙안군과 흥양

  낙안군(樂安郡) 동학군들은 다른 지역과 같이 초기 혁명운동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이후 전주화약이 이루어지자 낙안으로 돌아와 활동하였다. 강력한 보수세력이 없었던 관계로 커다란 방해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6월 이후 집강소가 정착되면서 이 곳 동학군들은 순천 김인배 동학군이나 남원 김개남 동학군과 합류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강사원 등은 많은 휘하 동학군을 이끌고 남원에 올라갔다가 청주 공격에 참가한 바 있었다. 한편 일부 동학군들은 순천 김인배 동학군과 합류하여 하동, 진주를 공격하는 데 참가한 바 있었다. 낙안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는 접주 강사원과 이수희(李秀希, 喜)였다. 그 중 동면의 이수희는 처음에는 흥양현 유봉만 대접주와 손잡고 남원에서 활동하였으나 10월 이후에는 순천으로 내려와 김인배(金仁培) 동학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보성 접주인 안귀복(安貴福)도 낙안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순무선봉진등록』에 의하면 "동학 거괴인 안규복(安奎馥)은 혹은 돈녕(敦寧), 혹은 호남좌도 접주, 혹은 집강이라 하는데 많은 동학군을 거느리고 근읍에서 크게 화를 지은 자이다. 본읍 수성군과 서면 사람들이 12월 22일 유시에 외서(外西) 돌이치(突伊峙)에서 체포하여 당일 미시에 효수하였고 그 수급은 좌수영에 보냈다"고 하였다 한다. 이들은 12월 하순에 체포되어 사살되고 말았다. 흥양현(興陽縣, 高興郡)에는 쟁쟁한 동학접주들이 많아 혁명 초기부터 활동이 대단하였다.『천도교서』에는 "유희도가 4천군을 거느리고 흥양에서 일어났다"하였다. 그런데 유희도(柳希道, 劉奉萬)는 6월 하순부터 남원으로 올라가 교룡산성을 점거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10월 14일 김개남이 청주로 북상할 때 남원에 남아 남원성을 지켰다. 『오하기문』에 의하면 "흥양접 만은 기율이 있었으며 접주 유복만(劉福滿)은 무리를 잘 다스려 이름난 부자나 교활한 서리들을 찾아내어 고문하고 약탈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나머지 평민들은 일체 불문하였다" 한다. 유복만은 11월 28일에 남원성이 박봉양에게 점령되자 흥양으로 내려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12월 20일까지 활동하고 있었다. 유복만과 함량진은 당시 회룡총(回龍銃)과 모슬총(毛瑟銃)을 갖고 있었다 하여 동학군의 무장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2월 15일 장흥에서 동학군이 대패하자 사기는 떨어졌고 보수세력들은 날뛰었다. 결국 12월 25일경에 민보군이 조직되어 대접주 유복만과 오준언(吳俊彦)을 비롯하여 27명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12월 28일에 흥양으로 들어와 3일간 있다가 1월 1일에 떠났으며, 이 때 경병도 흥양으로 가다가 양강원에서 일본군을 만나 같이 유숙하고 2일에 흥양으로 들어왔다가 4일에 떠났다. 일군과 관군이 연달아 들어오자 동학군은 타 지역이나 섬으로 피신했다.



결  론

  남원지역의 동학혁명도 다른 지역의 동학혁명운동처럼 초기에는 거칠 것 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망동으로 청국군을 불러들이자 일본군까지 들어오게 되어 동학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근대화로 앞서갈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치고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여 고초를 겪어야 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학군의 9월 기포는 주권을 사수하기 위한 반외세의 항일전이었다. 힘을 합쳐도 헤쳐나가기 어려운 국난을 당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외면하고 그들을 물리치려는 동학군을 학살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집권층과 성리학을 숭상하던 보수세력들의 착각은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다. 1895년에 민중전이 살해되자 일부 유생들은 비로소 항일의병활동으로 나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10월 이후 도처에서 항일전에 참가하였던 동학군은 끝내 무기의 열세로 비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수십만의 월등한 인원을 동원했던 동학군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확보도, 엄동설한과 싸우는 것도 어려웠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린 동학군은 게릴라전도 펴보지 못하고 일본군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하면서 혁명의 깃발을 내려야 했다. 1894년의 동학혁명운동은 실패한 혁명운동이었으나 그래도 이 나라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확신한다. 당시의 역사적 현실은 조선왕조의 해체는 물론이요 중국의 왕조나 서양 문명도 병들어 해체기를 맞은 시기였다.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고귀한 피를 흘렸던 전라 죄도 남원지역 동학군의 드높은 기개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천도교중앙총부 교사교리연구 제 2호 - 포덕 14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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