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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을 세웠던 문확돌과 남원성보호수

글쓴이 : 편집실 날짜 : 2022-06-02 (목) 13:55 조회 : 103


▲[사진설명] 남원성 북성벽 정비사업 과정에서 나온 문확돌 및 주변의 보호수(제공:김용근/문화자원연구소)
 

남원성 북성벽 정비사업 과정에서 나온

문을 세웠던(돌쪼기) 문확돌과 남원성보호수  



남원읍성 북측성벽에는 남원성보호수가 자라고 있다. 전래 되는 말로는 애기묘가 있어서 제를 지내왔었다고 전한다. 또한 성벽남쪽(안쪽)으로는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만인의총 성역화사업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기었다.


정치 군사적 거점, 남원! 

조선태종 13년(1413) 10월에 8도를 새로 정하면서 전국에 74개의 도호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남원은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그리하여 순창군 · 용담현 · 구례현 · 임실현 · 운봉현 · 장수현 · 무주현 · 진안현 · 곡성현 · 광양현 등1 군 9현을 관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는 당시 남원에 1,300호에 4,912명이 거주하였다고 적고있다. 한편, 세조 1년(1455)에는 지방 군사 조직을 일대 혁신하여, 각도의 중요한 곳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인근의 고 을을 분속시키는 군익도 (軍翼道) 체제를 갖추면서 전주도(全州道)와 남원도(南原道)를 두었다.
 











세조 10년(1464)에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면서 나주 · 장흥 · 광주 · 부안 · 순천 · 전주 등과 함께 거진(巨鎭)의 하나가 되었다. 이 때 남원진(南原鎭)에는 임실 · 장수 · 순창 · 운봉 · 옥과 · 곡성 · 구례가 속하게 되어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으로 확고히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남원부(南原府)가 되어 남원과 구례 · 운봉 · 곡성 · 순천 · 광양 ·임실 · 장수 · 진안 · 담양 · 순창 · 옥과 · 용담 · 창평 · 무주 등을 관할하는 정치적 · 군사적 중요한 거점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남원시홈페이지>
 


남원성 싸움과 만인의 총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험준한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중요한 관문으로 예로부터 호남의 인후지지(咽候 之地)라했다. 이러한 남원의 지리적 여건은 군사적으로 남원을 방어하는 것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관건 이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공격목표를 적국(赤國) 전라도로 삼고 좌군과 수군 56,800명의 대군으로 남원성(南原城)을 침공하였다.
 




8월 12일에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주력인 소서행 장(小西行長)의 부대가 남원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고 남원성을 사수 하는 조선군 1,300여명과 명나라 병사 3,000여 명, 그리고 다수의 성내 주민등 1만여명이 혼열일체로 분전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다. 8월 16일에 조선군 등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전사하여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비록 남원성은 함락되었으나 남원성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고 전력을 소실한 왜군은 조(朝) ·명(明) 연합군의 저지 에 북상이 좌절되어 왜란(倭亂)이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충열사(忠烈祠 )를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사적 제272호로 지정된 만인의총(萬人義塚)이다. 이 싸움에 대해 [선조실록(宣祖 實錄선조30년 8월을해)]은 " 남원 주변의 주민과 부녀자 들에 이르기까지 참전하여 용감히 싸워 많은 왜군을 죽여 충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남원시홈페이지>


충열사
북부 동충동은 남원역 뒤에 위치한 마을로 원래 충렬사와 만인의 총이 있어 충렬사 마을로 불리고 있다.  만인의 총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던 군.관.민등 일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왜병과 싸우다가 조국 수호신으로 순국하신 분들을 한곳에 묻어 놓은 곳이며, 충렬사는 이때 순국한 분들의 충혼을 한곳에 봉안한 사당. 이후 1964년 충렬사와 만인의총은 향교동으로 옮겨 경내를 성역화하였으며 충렬사 마을 뒤편에는 지금도 삼국 시대에 축조한 남원성의 북벽이 최근에 일부 복원되어 약210m의 터가 남아 있다.<남원시홈페이지>





<문화대간 기행
김용근/문화자원연구소장>

        남원성 애장목 이야기


20여년전 남원과 관련된 구전조사를 하다가 경주에서 옛 조상이 남원성에 살았었다는 후손을 만났고 선조들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던 남원성 애장목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의 실체는 기록으로 확인할수 없는 전중후가 가느다란  이야기였고 조상이 남원성 안에 있는 팽나무 당산에 아이들의 애장 고사를 지내주었다는 것이 큰 줄거리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도시가 되어 버린 곳에서 남원성 안에 있었던 것들의 흔적을 찾아 보았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나왔을 만한 곳으로 짐작되는 곳은 한군데였고 보호수로 지정된 300여년쯤 되는 팽나무였다 

일제 강점기때 촬영한 사진에도 보이는 그 팽나무가 몸에 들였을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 했었으나 아직까지 그 실체의 기록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 

 조선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가 있기 며칠전 남원성에 살던 한 농부는 외동아들을 데리고  처가의 장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임실로 떠났다 

며칠후 남원성은 함락 되었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목숨을 잃었다 

농부는 며칠후 왜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성 집에 돌아와 보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농부는 왜군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들의 주검중 미처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7명의 아이들 시신을 모아 평장으로 애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매월 보름날마다 애장고사를 지냈다 

세월이 흘러 농부는 죽고 아들마져 임실로 떠나버리자 그 평장고사는 사라졌다 

정유년 남원성 전투로부터 100년후 1700년대 애장고사가 사라진 그 무렵 남원성에 괴이한 일이 생겨났다 

 매월 보름날이면 까마귀 7마리가 성벽아래에 모여 울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람들은 까마귀가 모여든 그곳을 파보았다 어린아이 유골 7구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아이들 유골을 만인묘에 합장시켜 주었다 

 며칠이 지났고 그곳에 까마귀가 나타나 나무 씨앗 하나를 물어다 놓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나무 씨앗이 아이들의 평장 무덤에서 살던 영혼이라고 믿고 그곳에 심었다 

그 나무는 자라 애장 당산목이 되었고 사람들은 매년 정월에 애장 당산고사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남원의 일본관련 문화를 말살했다 황산대첩비파괴와 금암봉 일본신사 설치, 만인의총에 철도개설등 그러나 남원성 애장목은 제거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룡산신이 그 애장 당산목을 내려다 보며 아이들의 영혼을 보호해 주고 있어 그 나무를 베에내면 고을에 큰 재앙이 생겨난다는 백성들의 믿음이 컸고 그 여론을 무시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나무는 살려 놓되 이야기는 소멸시켜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애장 당산목은 82. 9. 20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의 표지석에는 수고14m 둘레4.5m 수령 240년 팽나무라고 적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곳에서 남원성 복원을 위한 주변정리 작업이 진행중이다 

 팽나무는 지금도 건재하다 

나는 지금 일본군의 창칼에 무참하게 죽어갔을 아이들의 영혼이 환생한 그 팽나무 앞에서 묵념 한번으로 그 구전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뿐이다 

 오늘  그 팽나무를 사진에 담고보니 부여 가림성 사랑나무 보다 더 하트다운 사랑의 하트를 몸에 달고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는 성자의 마음이련가 

사랑의 도시 남원의 유전자이련가 아픈 가슴으로 카메라 샷터를 눌러야 했다 

 고을의 스토리 자원은  문화 디자인의 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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