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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두산의 극락사를 찾아서......

글쓴이 : 편집실 날짜 : 2022-03-20 (일) 12:21 조회 : 75


견두산의 극락사를 찾아서.... 

견두산은 조망이 좋은 산이다. 남원시 수지면 뒷산으로 전남 구례와 남원시의 경계를 이루며, 또한 도계이기도 하다. 해발 774m로 호두산이라 부르던 것을 일제하에서 견두산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어 산악인들은 호두산이라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옛 고지도들을 확인한 바에 의하면 대두산이란 표현과 견두산이란 표현뿐이다. 호두산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마 대두산이라 표기되었을 때 호두산이라 칭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이후의 지도에서는 견두산으로 표기되고 있다. 마을의 유래에 설명 된 바처럼 이서구 관찰사가 대두산을 견두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니 그때부터 견두산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서구는 영조50년 177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지평과 교리를 거쳐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지냈다. 

우선 이서구 관찰사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할듯하다. 이서구 관찰사는 전라도 관찰사를 한후 승진을 하여 평양감사를 할 때의 이야기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지역에서 민심이 흉흉하고 변란의 위기가 있자 조정회의를 했다고 한다. 그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회의 였는데, 당시 결론이 평양감사를 하고 있는 이서구 감사 아니면 민심을 수습하기에 어렵다는 결론으로 이미 8년전에 전라도 감사를 했던 이서구 감사를 전라감사로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때 이서구 감사가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어려가지 문제해결과 민심을 달래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특히 이서구 감사는 풍수지리학에 많은 조예가 있어서 각지역의 비보적인 시설과 대책은 물론, 여러 가지 현안 문제들을 해결을 했다고 한다. 알다시피 남원의 여러 가지 희망적 이야기나 비보책에 대해서는 이서구 관찰사의 이야기가 대부분임을 알 수가 있다.

※남원투데이는 남원포유에서 사회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운영했던 인터넷신문이다. 당시의 남원포유는 문화 및 안내 등을 중심으로 포털로 운영했었으나 남원투데이를 내리고 남원포유를 인터넷신문으로 재등록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서구 관찰사는 대두산(호두산)에 들개들이 떼를 지어다니며, 민간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이에 호석을 수지면 고정리에 제작을 해서 설치를 하고 현재의 광한루원에 있는 호석을 마들어 설치를 하고 산이름을 견두산이라고 고치었더니 들개떼들에 의한 피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이야기로는 당시에 관리들이 너무 부패하여 백성들을 너무나 핍박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 이들을 처단하고 바로잡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 때에 비보책으로 만든어 설치를 한게 광한루원의 호석과 견두산아래 고정마을에 설치된 호석이라고 한다.



※특히 마애불은 남원문화대학에서 답사후 문화재 등록을 건의하여 문화재 등록을 한바 있기 때문에 관심이 많기도 하다. 또한 견두산이라는 명칭보다는 예전기록에 호두산으로 불리었다는 기록들이 있기에 계속되게 호두산이라는 명칭의 강조와 수차례 언론에 기고를 하기도 하여 호두산이란 인식을 앞세운 바도 있다. 

 

▲ 견두산 정상에서 밤재방향으로 100M 지점에 위치한 전북도 유형문화재 199호인 ‘견두산 마애여래입상’

특히 견두산은 전북도 유형문화재 199호인 ‘견두산 마애여래입상’이 있으며, 또한 철쭉 군락지가 발달되어 철쭉이 피는 계절엔 비경을 즐길 수 있어 등산객이 찾곤 한다.

 

▲ 견두산 아래 수지면 고정리에 설치되어 있는 호석


견두산 아래의 수지면 고정리 마을엔 견두산에 들개떼들이 많아 이를 제압하기 위해 세웠다는 호석(虎石)을 볼 수 있다. 

 등산로 정비가 안 되어 산을 가로질러 능선을 타고 정상에 도착한 일행은 조망된 경관에 빠져 휴식을 취한다. 이후 옛 극락사를 찾고자 울창한 숲속을 헤친다. 가시덩쿨과 잡목사이를 헤치며, 전진하지만, 실상은 급경사를 따라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갈 뿐이다. 견두산의 정상에서 밤재방향으로 100여m 지점에 커다란 바위에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부처가 조각되어있는 하단부에는 물이 고였음직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현재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양경님씨 홈페이지 참고 http://www.ygn21.co.kr/mw-builder/bbs/board.php?bo_table=B07&wr_id=929&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7)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아래엔 물이 고여 식수로도 활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바위조각으로 메꿔져 있음을 보면 혹여 바위를 타고 올라온 수분이 조금씩 모이지 않았을까하는 예측을 해 본다.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앞측 30여미터 지점은 넓다란 공간을 확보되어 있으며 깍아지른 바위절벽의 윗부분이 된다. 깍아 지른 절벽이 심하여 가까이 접근하여 아래를 바라보기 조차 두렵다. 앞쪽의 암반이 약간 낮은 지점에 위치하여 더욱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앞면부위 암반에 발을 내밀기 조차 두렵다. 발끝 아래로 보이는 수지면이 조망되고 멀리 남원 시가지가 보인다. 

 금번 견두산 산행의 목적은 견두산 마애여래입상과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극락사를 찾고자 하였다. 정상에서 밤재방향으로 향하자 바위산지점을 등반하게 된다. 암벽 벼랑에 자리잡은 노송이 그 운치를 뽑 낸다. 500여m쯤 내려오자 철쭉군락지가 나타난다. 일행은 극락사를 찾기 위하여 등산로를 벗어나 곧 바로 산 아래를 뚫고 나간다. 예전에 극락사지를 다녀왔다는 안내자가 있지만 길이 아닌 계곡을 타고 다녀와 어느 정도의 그 지점만 안내하는 정도다. 774m의 산이라는 생각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작정 찾아 나선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산자락을 헤집고 1시간 여간 내려왔지만 아직도 숲 속만을 헤맬 뿐이다. 정상에서 요기를 하였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숲을 뚫고 내려온지라 몸은 상당히 지쳐가고 있었다. 우선 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자하여 전을 펼친다. 산속을 헤집어 다니려면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심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산속을 헤집고 내려간 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선발대에 섰던 일행에게서 전화가 온다. 계곡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계곡을 타고 얼마쯤 내려가자 정말 절터가 있었다.

▲극락사 절터지에서 (세월이 지난동안 계곡물이 범람하여 절터를 휩쓴 흔적들이 보인다.) 

 

극락사의 식수원이 됨직한 명천샘이라 불렀다는 샘터도 있었고, 그 샘으로부터 흐르는 물줄기가 작은 고랑과 내를 만들기 시작하여 졸졸거리며 물줄기를 만들고 있었다.




▲ 명천샘으로 불리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바윗사이에서 물이 솟고있으며, 그 물줄기가 작은 고랑을 이루고 내려간다.
 


극락사는 백제시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극락사가 창설당시 사찰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고 하며, 빈대가 많아 견딜 수 없어서 사찰을 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골짜기를 "극락이 골짝"이라 부르며, 극락이 골짝에는 자갈이나 돌이 많아 그 부근의 바위나 돌을 들춰보면 지금도 빈대껍질이나 빈대허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전한다. 극락계곡을 갔다 오면 빈대알을 묻혀와 집안에 빈대를 번식케 할 우려가 있다하여 사람들은 골짜기를 가기를 꺼려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해선지 극락사는 이야기로만 전해져오고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극락사지는  주위가 넓고 깊은 원시림 속에 묻혀있다. 극락사지 주변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그 속에는 으름이 숲을 이루고 있다. 얼마쯤 내려오자 연리목이 있다.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함께 뿌리를 가진 아름드리 연리목이 위용을 뽑낸다. 이뿐인가 서어나무가 한 뿌리에서 두 가지가 뻗어 나와 음양의 조화를 이룬 음양수가 되어 있다.또한 아름드리가 넘는 다래나무 넝쿨이 나뭇가지를 휘어 감고 그 거대함을 뽐내 숲을 이루어 있어 다래넝쿨을 타고 오를 수 있다. 빈대가 옮겨 질까봐 발길이 뜸해선지 이곳 극락사지 부근에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곳곳에        으름이 있으며, 덩쿨이 나뭇가지에 얽키어  곳곳에 주주렁주렁 달려있다. 

 

 극락사를 찾았다는 기쁨과 거대한 다래넝쿨이나 연리목, 음양수 등을 찾는 기쁨을 만끽하지만 이젠 돌아 갈 길이 막막하다. 옛 절터여서 혹여 산길이 있을까 주위를 살피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은 산자락을 뚫고 나가기보다는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계곡으로 가기 어려운 곳은 산자락을 뚫고 나가고 가능한 계곡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계곡을 따라 얼마쯤 내려왔을 때 동네의 수원으로 사용하는 호스가 여러 가닥이 깔려져 있다. 그곳에서 부터는 사람들의 왕림이 있어선지 산길이 다듬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숲으로 인적이 드문 탓에 보기드문 원시림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계곡물이 맑다. 이렇게 좋은 수림과 풍광이 이어지는데 견두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전래 되어온 전설의 탓일까. 이렇게 얼마를 내려오자 이게 웬건가 독립가옥 한 채가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그대로 망가뜨리고 있다. 

주변환경은 온통 쓰레기와 어수선한 빈지짝들이다. 대부분 불법시설로 보이는 난잡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계곡은 음식물과 돼지머리가 나뒹굴어 그 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려 환경오염을 시키고 있다. 또한 계곡에는 곳곳에 촛불이 켜지고 무당이 굿을 했음직한 여러 형태들의 잔유물이 남겨져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은 부패가 되어 보인다. 산길을 내려오자 아래로 저수지(마륜지)가 보인다. 산을 둘러 경작지가 보이고 1KM쯤 내려오자 마륜마을이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서자 각종 계획된 팻말과 설명판이 보인다. 이미 마을은 조용하고 몇몇집만이 사람이 거주한 듯하다.

 

견두산에서 옛 극락사지를 찾아보면서 사람의 손길이 닻지 않아 엄청난 자연환경을 만끽한다. 그러나 아쉬운점은 견두산이 갖춘 비경과 등산코스 그리고 주변의 문화재들과 연결하여 등산로를 개발하고 시설물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음이다. 마륜마을을 지나 계곡주위로 등산로를 개발하여 옛 극락사를 발굴하고 그 위로 철쭉 자생지와 마애불 정상 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발된다면 많은 등산객들이 구례방향을 이용하지 않고 남원방향으로 등산객이 모일 것이 예상되며, 마륜마을의 마을가꾸기 사업과 연관지을 수 있어 보인다. 

 위 내용이나 사진은 2011년도에 찍은 사진과 당시의 내용으로 약간 변형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으름: 으름덩굴이라고도 한다. 산과 들에서 자란다. 길이 약 5m이다. 가지는 털이 없고 갈색이다. 잎은 묵은 가지에서는 무리지어 나고 새가지에서는 어긋나며 손바닥 모양의 겹잎이다. 작은잎은 5개씩이고 넓은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끝이 약간 오목하다.
 

다래: 다래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성 낙엽만목의 열매. 우리나라·중국·일본에 자생하며 깊은 산의 숲속, 토양이 깊고 부식질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길이는 7m에 달하고 어린 가지에는 잔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넓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다. 꽃은 2가화(二家花)로서 5월에 피는데 백색으로 3~10개가 달린다. 열매는 난상(卵狀) 원형으로 10월에 황록색으로 익는데 맛이 좋다. 다래나무의 껍질과 줄기는 노끈으로 대용되기도 한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석모산인(席帽山人), 소완정(素玩亭), 녹천관(綠天館) 등이다. 177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지평과 교리를 거쳐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지냈다. 박지원(1737-18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실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글씨와 시문에 뛰어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와 함께 사가시인(四家詩人)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문집 《강산집》, 《척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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