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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산 스마즈 가문의 묘소를 찾아서.....

글쓴이 : 편집실 날짜 : 2018-11-12 (월) 08:01 조회 : 139

고야산의 스마즈 가문의 묘소를 찾아서......


비행장에서 한시간 반정도를 달려서 가더니 이제는 정령치를 오르는 길보다 더 난코스인 산길을 올라간다.  우리가 타고있는 버스는 일반버스보다는 적은 25인석 정도의 작은 승합차다. 그런데도 다른 차와 교차할때면 불안 불안 하는 정도로 도로면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산높이가 해발 800M정도 인듯한데, 산이 굉장히 급경사의 악산인 관계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도로가 바로 밑에 구줄구불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험난한 길을 아슬 아슬하게 30여분이상 오르고서야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그곳엔 높은 산의 산장같은 분위기의 마을이 나타 난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곳이다.
차에서 내려 주변의 안내판을 보니 88개의 사찰이 있다는 표시들과 왠 무덤이 즐비하게 표시되어 있다.

곧 고야산의 오쿠노인(奧之院) 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수많은 일본의 영웅들과 , 고승들 , 다이묘들 , 기업인들의 묘가 함께 자리하는 곳입니다.

험난한 길을 올라온 이곳이 고야산 (高野山) 으로 와카야마현에 있는 산으로 일본의 3대 영지 중 하나라고 한다. 애초엔 산악신앙지였던 고야산에 헤이안 시대 일본 불교의 2대 영웅 중 한 명인 구카이 (弘法) 대사가 자리 잡으며 진언종을 연 것이 고야산이 성지화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내판의 설명문처럼 88개의 사찰이 있는 산으로 밀교의 한종파의 총본산인 것이다.  고야산의 오쿠노인에는 20만개 이상의 묘소가 있다고 하는데, 각자의 특색에 맞도록 묘지조성을 해 놓았으며, 가족 공동묘지로서 납골당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하튼 모두가 초행길이라 주차장까지 오긴 잘 왔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안내된 길로 묘동이 있는 즐비하고 곧장 20여분을 올라왔더니 우리가 찾고자 하는 목적지로 가는 양갈래길에서 그만 출입금지라고 쓰인 안내판과 못들어가게 줄이 쳐져 있다.  그곳엔 통행을 막고 서있는 나이가 듬직하신 분이 지키고 있다. 왜 통행이 금지됬냐고 묻자, 이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난 태풍으로 나무가 넘어지고 도로가 붕괴되어 복구 공사중이라고 한다. 

남원에서 공양비를 보기 위해서 왔다는 설명을 하자 공사장의 감독관에게 안내한다. 양해를 구하자, 다른 곳에 있는 책임자에게 전화연락을 하고서야 승낙을 받고서 현장을 답사하게 된다. 
이로인해 목적지 근처의 공사가 잠시중단되게 된 것이다.


하튼 양해를 구하고 70여미터 들어가자 목적한 문제의 공양비가 있는 시마즈 가문의 묘소를 찾게 된다.
문제의 사진속의 공양비가 확인 된 것이다.


시마즈 가문의 묘소 앞에는 특별히 문화재 표시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 팻말에 씌어진 내용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와카야마현 지정 문화재>
사적 '고려진 적군아군 전사자 공양비'
1599년에 사쯔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이에히사 부자(父子)가 고려전쟁에서의 적군과 아군 전사자의 영(靈)을 공양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일본 무사도 박애정신의 발로라고 알려졌다.
1971년 3월 31일
와카야마현 교육위원회, (재)고야산문화재보존위원회...

일본은 1800년대 후반, 적십자사의 전신인 박애사를 결성하고, 국제적십자사에 가맹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은 이 비석의 내용을 증거로 내세워 자신들이 오랜 옛날부터 박애정신을 펼쳤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국제적십자연맹에 가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가식적인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증거들이다.


그 문제의 비석에는 적군과 아군의 전몰자에 대한 위령비다,...

비문에는 고려전쟁이라고 적혀있다. 아마 조선을 국가로 인정 안한다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교토시와의 간담회에서도 “역”으로 표현을 했었다. 다시말하면 당시에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듯 기록에서도 고려전쟁이란 표현이 되어 있다. 

시마즈가 이 비석을 세운 것은 아마도 자신을 위해서 였을 것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살생을 했으니, 불교를 믿는 신자로서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서는 것이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해서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죄값을 가볍게 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튼 고야산 오쿠노인(奥の院)에서 가식적인 일본의 진면목을 보게 된것이다.  더 나아가서 1800년대 후반 적십자사의 전신인 박애사를 결성하고 국제적십자사에 가맹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자 이에 일본은 국제적십자사에 가입을 하기 위해서 이 비석의 내용을 증거로 내세워 국제적십자에 가맹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재가 된듯하다.

하튼, 정리를 해보면 시마즈가 운 좋게 살아 돌아와서, 적군 즉, 조선군 전몰자 81,500명, 일본군 전몰자 3,420명, 양쪽 모두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의 비를 세우게 된것이다
그런데. 1800년대말에 이비의 내용이 적군아군 없이 전몰자에 대한 명복을 빈다는 내용의 비가 1971년에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덧붙인 문구다.

바로 '일본 무사도 박애정신의 발로'라는 말이다. 이 문구가 너무도 가증스럽기만 하다.
일본의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된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현지를 보면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금방 느낄 수 있는 20여먄개 이상의 묘가 돈 자랑하듯 서로 구미기 대회를 하듯 조성된 묘지다.  곳곳의 묘들이 각자의 특색을 갖춰서 홍보관 같은 느낌을 갖는 공원묘지이다.  이들의 꾸밈이나 표현의 미화는 말할 것도 없는 오쿠노인(奥の院)에 조성된 공양비의 비문에 대한 설명을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남원성 전투에 인용한다는 것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 이해할 수 없음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를 자랑하듯 언어적 표현도 불분명하게 언론플레이를 하는 조직은 또한 뭣하는 조직인지.....
정말 씁쓸하기만 하다. 




시스템관리자 2018-11-15 (목) 20:13
저런 유치한 공양비나 내용을 인용하는 인간들은 어떤 종류일까요....
한국사람이 아니라면 모르지만... 이를 또 대단하다고 홍보하는 의도는 무엇이고...
남의나라 쳐들어와서 살육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코를 베어가 놓고, 무슨 무사도니 박애정신이니 찾는건지.....
대부분 유약한 사람들의 코를 베어갔음은 뻔한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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