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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문화대학 지리산문화해설사 답사 (구례권)

글쓴이 : 시스템관리자 날짜 : 2018-04-08 (일) 15:00 조회 : 216


남원문화대학 지리산문화해설사 답사 (구례권)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도 그래도 잊지 못하고 지리산 자락을 뱅뱅도는 모습이 우물안 개구리 랄까! 그러면서도 지리산자락의 주변경관과 삶의 이야기에 감탄을 하고 느낌을 받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할한 자락만큼이나 그 삶의 이야기가 널려있는 곳이 지리산 이다. 이번주도 지리산문화해설사 과정의 수강생들과 함께 구례권의 답사를 시작한다.

온 누리에 봄꽃이 만발하자 아무래도 천상보다 아름다운 남도의 아름다움에 시샘을 한 듯 4월에 때 아닌 눈이 내린다. 봄꽃철이라 관광차 준비가 여간 어렵지 않더니 다행스럽게도 버스가 준비되어 버스한대와 안내하는 승용차로 금번 답사를 하게 된다. 

남쪽의 섬진강 줄기는 예상외로 벚꽃이 일찍 피게 되어 지역마다 지역축제를 계획하였지만, 이미 벚꽃은 져버렸거나 눈까지 내리는 차가운 날씨로 섬진강의 꽃길을 찾아야 하는 관광객들은 발길은 취소되어 버린 듯하다. 하튼 꽃눈이 내려야 하는 축제장이 눈꽃이 날리니... 역시 인산인해와 차량이 강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저 썰렁할 뿐이다.

예상치 못한 기후변화로 금년엔 예상보다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어 봄꽃들은 1주일이상 일찍 핀데다 이 꽃 저 꽃 할 것 없이 시차 없이 봄꽃들이 속전속결로 꽃망울을 터트려 버렸다. 여기에 더 예상치 못한 눈까지 펑펑내리니 연약한 꽃잎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꽃눈이 내려야 할 시기에 눈꽃이 내리니...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역시 정보화 시대답게 남쪽으로 상춘객들이 밀려야 할 판에 눈꽃이 휘날리니 관광객들이 올 리가 없는 것이다. 하튼 답사팀은 걱정으로 코스까지 관광객들과 반대로 바꾸는 소동을 벌였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소통에 어려움이 없게 된다.



 남원-연곡사- 석주관성 7의사묘-운조루-곡전재-사성암-쌍산재-매천사-운흥정-남원


○연곡사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에 있는 절.
"신라 진흥왕 5년(백제 성왕 22년 "(544)“ 인도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며, 국보 제53호 동부도(東浮屠), 국보 제54호 북부도(北浮屠)와 보물로 지정된 3층 석탑, 현각 선사 탑비(玄覺禪師塔碑), 서부도(西浮屠) 따위가 있다. "선종 사찰로 도선국사, 현각선사 등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연곡사 스님들의 승병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왜군에 의해 완전 전소"되었으며, 특히 "1907년 연곡사가 항일 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다시 일본군에 의해 완전 전소되었고, 1950년 6ㆍ25전쟁으로 또 다시 전소되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참고로 남원의 4대고전중의 하나인 조위한(趙緯韓)이 지은 『최척전(崔陟傳)』이란 고소설에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환타지적 이야기인 주인공 최척과 옥영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작되고 이어서 전란으로 연곡사에 피난을 가서 그곳에서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는 배경지로 등장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석주관성 7의사묘



석주관성 7의사묘 답사다. 이곳은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구례지방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을 사수하다 전사한 의사 6인과 석주관 전투에서 살아남아 그 후 병자호란 때 재차 의병을 일으킨 의사 1인을 모신 무덤이다.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나라에서도 구례현감 이원춘을 석주관 만호에 겸임케 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선조 31년(1598) 8월초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고자 왜군이 이곳 석주관에 쳐들어오자 이원춘은 중과부적을 느끼고 남원성으로 후퇴하여 남원읍성에서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이때 구례의 선비 왕득인은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에서 오는 왜적을 맞아 공격하다 전사하였다. 왜적이 구례의 부락에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구례현의 선비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 등이 모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석주관을 지키던 중 다음해 봄 왜군의 공격에 대항하다 왕의성을 제외한 5의사는 순절하였다. 왕의성은 살아남아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나라를 구하고자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는 이들 일곱 의사의 충절을 기려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다.


○운조루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류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고 하는데, 큰사랑 대청 위 상량문의 기록은 1776년(영조 52)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 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 ·사당 ·연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 위에 있으며, 중문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 마루 끝에 선 것이 지름 약 2.3m의 둥근 기둥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난 기둥이다. 안채 남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맞배지붕 홑처마집이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사성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오산(鼇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544년(성왕 22) 조사 연기(緣起)가 창건하여 오산사(鼇山寺)라고 했다.
그 뒤 신라의 원효(元曉)와 연기도선(烟起 道詵), 고려의 진각(眞覺) 국사혜심(慧諶)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 하여 이들 네 스님을 기려 이름을 사성암이라 고쳐 불렀다. 1630년(인조 8) 중건하였으며, 1939년 이용산(李龍山)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일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로는 인법당(因法堂)만이 있으며 유물로는 도선이 조각했다고 전하는 마애불이 있다.


○쌍산재



쌍산재는 지리산권 전남 구례군 소재 고택 한옥으로 그 의미는 운영자의 고조부님의 호(쌍산)를 빌어 쌍산재이다. 가훈으로는 "집안 화목"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특히 안채의 뒤주는 그 의미가 특별하다.

과거 춘궁기 시절 봄에는 맥류를 가을에는 미곡을 채워 두고 식량이 부족한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그 해에 이자 없이 받아 채워 두고 그다음 해에 또다시 사용하게 했던 나눔의 뒤주가 현재 보존되어 있다. 운영자의 선조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으며, 자신을 세상에 크게 드러내지 않고 평생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세속에 구속받지 않은 전형적인 유학자이셨다.

이런 조상의 삶의 역사인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색다른 쉼터로 후손에게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한 교육의 장으로서, 어른들은 어릴 적 추억으로 격동기 시절 우리나라가 겪었던 애증의 시절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천사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현 선생은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경장·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과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을 지어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김택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생전에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운흥정과 용쏘



운흥정은 '구름이 흥을 내어 지나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즐겼던 곳으로 정내(亭內)에는 기문(記文)과 시문(詩文) 등 85개의 현판이 거액되어 있으며,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용소에 잠긴 암벽에는 운흥사(雲興社)라는 글자가 새겨 놓아 운치를 보탰다.
1926년 이 지역 선비들이 시사계를 조직하여 지역 풍속을 아름답게 만들고 시(詩)를 발전시키기 위해 만든 정자이다.


정자 안에는 운흥정 건축의 시작과 끝, 참여자 이름 등을 적어 놓은 글과 시사계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글이 걸려 있다.

지리산 노고단 줄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산수유 밭 사이로 흘러내려 계곡을 이뤄 하천을 만들 즈음 기암괴석사이를 흐르는 계곡에 집채만한 암반위엔 운흥정이라는 누각이 서있다. 하천의 이름도 옛 중국의 서시가 다녀 갔다하여 “서시천”이며, 그 이름은 선계를 뜻하듯 구름이 피어오른다는 “운흥정”이 자리한다.


이곳일대는 조선초기에 전라감사를 지낸 경재 하연선생과 용에 얽힌 전설이 있으며 후대에 기록된 비석을 모셔둔 비각이 있다.

세종 4년(1422) 하연(河演)이 전라도도관찰출척사병마도절제사(全羅道都觀察黜陟使兵馬都節 制使)로 있을 때 남원 중방현(中坊縣) 객사에서 유숙한 일이 있었는데, 꿈속에 어떤 백발신옹(白髮神翁)이 나타나 말하기를, "제 손자 다섯이 대감의 반찬거리로 잡혀갔으니 죽이지 마시옵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며 시(詩) 한 수를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시는,(용성지, 남원지 자료)

용문산을 아홉 번 오르고 (九登龍門上)
큰 바닷물을 세 번 마셨는데도 (三飮天海水)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때 (未及成龍時)
장유자라 하는 자에게 잡혀갔나이다. (命付發孺子)
라는 내용이다.

하연이 놀라 잠을 깨어 좌우를 살펴보니, 그 노인이 간데없어 너무나 괴이한 일이라 사령들을 불러 명하기를, "나를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물건은 빠짐없이 그대로 대령토록 하여라."하니, 꿈속 노인의 말에 맞는 물건을 찾았는데, 그 속에 다섯 마리의 잉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생명이 위급하여 서둘러 잉어를 잡아 온 장본인을 속히 찾아오라고 명하자 곧 어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 고장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어부 장유자(張孺子)입니다." 어부의 말에 놀란 하연이 잉어를 잡아온 산동(山洞) 못에 지체 없이 갖다 넣으라고 명하자 어부가 그대로 시행하였다. 삼일 후 또 꿈속에 백발신옹이 나타나 말하기를,

"손자 다섯을 살려 주시니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하고, 대감의 소망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하연이 본래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부탁할 만한 소망은 없으나 세상 사람들이 용(龍)의 형상을 보고자 하나 용의 형태를 본 사람이 없으니 한번 봤으면 한다고 하자 백발노인이 하는 말이,
"소인들은 용체(龍體)를 보면 생명이 감수하는데 대감께서는 대인이시라 용체를 봐도 무방하리라. 날이 밝으면 곧 산동 못가로 나오시오." 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날이 밝자 못가로 가니 갑자기 먼 산 그림자가 와 못 전체를 뒤덮고 안개가 자욱이 끼여 지척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즈음 황룡(黃龍)이 나타나 물속에서 왼쪽으로 굽이치더니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굽이치다가 마침내 머리를 드러내는데, 머리의 크기가 말(馬)의 머리만하고, 흰 수염에 검은 뿔(黑角)이 있어 한참 동안 익혀 보고 있는 동안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그 고을에서는 어부 장유자의 이름을 가능한 한 거명치 않는다고 하며, 혹 장유자의 이름만이라도 듣고 과거를 보면 그때마다 낙방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산동 못가에 가보면 바위 위에 새겨진 글이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 하연이 쓴 「용흥사(龍興詞)」라는 글과 「용견죽하(龍見竹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 이 못가에는 호남 일대의 선비들이 건립한 운흥정(雲興亭)과 견룡유적(見龍遺積)의 비각이 있어 생전에 하연이 지었다는 「용견시(龍見詩)」가 전해진다.(용성지, 남원지 자료)

산동의 바윗돌은 크고 높으며 (山洞之石落落)
산동의 푸른 물은 깊고 깊도다. (山洞之水淵淵)
황국화로 빚은 술 즐거운 이때 (黃花白酒堪樂)
구월이라 가을풍경 장히 좋구나. (正値九月風煙)

우리네 생각엔 참으로 답답하신 어른이시란 생각도 든다.
고작 용이라니.....
하기야 그래서 사후에 조정에서 청백리로 록선하셨겠지만......
하여간 선생은 다음 날 용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소원을 성취한 기쁨에 연못 암벽에 새겼다는 "용견죽하(龍見竹下)"라는 글씨가 남겨져 있으며, 또한 이렇게 좋은 경관에 유래까지 얽혀있으니 정자(운흥정)가 세워짐은 당연함이 아닌가.. 

암벽에 새겨진 용견죽하(龍見竹下)

이러한 선연의 업적과 그 후덕함을 기리는 뜻에서 외압에 의해서 국가관이나 문화가 말살되어 가는 어려운 일제 강점기에 지역의 선비들은 뜻을 모으고 선연들의 가르침을 기리었으며, 각종 시회를 열어 후학들을 양성하여 정신을 무장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그곳이 운흥정이며, 방호정이다.




3차답사 구례권 답사 사진 바로가기  
     - http://www.namwon4u.com/mw-builder/bbs/board.php?bo_table=B31&wr_id=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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